록펠러가 만들어낸 석유왕국
지난 99년 12월 1일. 세계 석유업계에선 아주 의미있는 날이었다. 미국 랭킹 1위 석유업체인 엑슨(EXXON)과 2위인 모빌(MOBILE)이 합병을 선언한 것이다.
두 회사가 합쳐서 된 엑슨-모빌은 단번에 유럽의 브리티시 석유(BP)와 로열더치쉘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BP도 미국계 아모크과 합병을 발표했지만 엑슨-모빌의 덩치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엑슨과 모빌의 합병은 석유업계 관계자들보다 두 회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태인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주었다. 두 회사는 원래 유태계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이란 하나의 거대 독점 회사였던 것. 1911년 셔먼 반 독점법에 의해 강제로 분할되었고 우여곡절끝에 87년만에 재결합하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분할과 합병의 역사가 있었지만 단순 총량면에서 유태계 기업의 영향력에선 변화가 없는 셈이다. 엑슨모빌은 한때 하루 생산량이 25억배럴를 넘어 쿠웨이트와도 맞먹는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던 거대 회사이다.
석유업계의 세계 최강 엑슨-모빌의 전신이었던 스탠더드 오일의 창업주는 ‘석유왕’으로 불리며 지난 20세기 세계 최대 부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바로 창업주인 록펠러의 생애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839년 미국 뉴욕에서 6명의 자녀중 두번째로 태어난 록펠러는 53년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침례교회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유태교회인 시나고그에는 열심히 다녔다는 흔적은 없으나 그는 분명 유태인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록펠러가 유태인인 이유는 먼저 그의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점. 유태종교에서 ‘누가 유태인인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유태인 여부이다. 어머니가 유태인일 경우 자식들은 무조건 유태인으로 인정한다.
만약 유태인 여성이 이종교들로부터 강간을 당했고 그렇게 해서 아이가 태어났다 해도 그 아이는 ‘무조건’ 유태인으로 인정된다.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아직도 보수적인 종파의 경우에는 유태인인 남성이 이교도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의 경우 그 아이가 유태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개종’이라는 공식적인 절차가 필요할 정도이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이름에서 찾을수 있다. 록펠러란 이름은 원래 독일계통의 이름인 로겐펠더(Rogenfelder)를 미국식으로 만든 것이다. 로겐펠더는 동부유럽에서 흔히 유태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베르사이유조약으로 인해 유전이 있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을 때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의 공작이라고 공격했는데, 바로 록펠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히틀러는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인 록펠러가 독일을 압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그런 판단은 나중에 6백만명의 유태인을 대학살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록펠러의 자수성가식 사업성장과 성공후 재산의 사회환원은 유태인 사업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8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의 6개월짜리 비즈니스 코스에 들어간 그는 과정을 3개월만에 마치고 휴위&터틀 이란 조그만 중개업체의 서기 보조로 취업했다. 3개월만에 받은 급여는 50달러. 1주일에 3.57달러를 받은 셈이었다. 회사측은 일 잘하는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하면서 임금을 한달에 25달러로 올려주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 1천달러와 아버지한테서 빌린 1천달러를 합해 모리스 클라크라는 친구와 함께 1859년 아예 중개회사를 하나 차렸다. 1859년은 마침 서부 펜실베니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온 해로 그가 살던 오하이오주를 비롯한 인근 주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석유산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868년 석유정제업에 뛰어든 록펠러는 1870년 1백만달러의 자본으로 스탠드 오일 컴패니를 세웠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사를 성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록펠러는 진정한 ‘석유인’이 아니었다. 매장된 석유를 파거나 이를 정제하는 본연의 업무를 통해 회사를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유전과 정제시설을 아주 싼 값에 매입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식으로 재산을 모으는 이른바 ‘금융비즈니스’로 석유산업을 송두리째 장악했다.
대형사가 아니었던 스탠다드 오일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할수 있었던 이면에는 당시에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던 ‘숨은 스토리’가 하나 있다. 록펠러는 석유를 운반해주는 ‘유니온 탱커 카’ 회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회사를 확장했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 1800년대 후반까지는 석유를 주로 포도주 저장탱크 같은 나무로 된 통으로 운반했다. 때문에 중간에 석유가 새거나 증발되어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이때 공간이 밀폐된 철로된 탱크를 처음 개발한 것이 바로 록펠러의 유니온 탱커 카 회사였다.
이 회사로 인해 다른 운송업체들이 모두 망했고, 록펠러 운송회사가 운반량을 줄여나가자 판매수단을 잃어버리게 된 대부분의 석유 석유 업체들도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록펠러는 1900-1910년 사이에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파산직전에 달한 회사들을 거의 거저 줍다시피 하면서 회사를 단기간에 급팽창시켰다. 스탠다드 오일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아칸사스 뉴저지 오하이오주등의 거의 모든 유전과 정제소를 소유했고 미국 에너지 비즈니스의 90% 이상을 통제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물론 록펠러는 ‘독점’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는 모든 불필요한 경쟁이 사라지고 ‘하나의 가격’으로 통일 되면 세상은 더욱 좋은 서비스를 받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석유시장을 지배할 경우 석유시장은 아주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다.
1911년 반 독점법으로 스탠다드 오일이 여러 개 회사로 쪼개지면서 이런 꿈이 이뤄지지 않자 그는 대신 외국 회사들과 연대해 또하나의 카르텔을 만들었다. 세계 석유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한 것.
따라서 1911년부터 OPEC(석유수출국기구)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1975년까지 세계 석유 가격을 하나로 단일화 할수 있었다. 당시엔 세계 석유회사들이 모두 ‘서부 텍사스 원유값’에 자신들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석유는 세계 어디서 사던 거의 같은 값 이었다.
록펠러의 독점꿈은 석유산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철광산 삼림등을 지배하기위해 제조 운송업등 수십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911년 대법원이 스탠다드 오일이 반독점 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한 이후 그의 회사는 모두 38개로 쪼개어 졌을 정도이다.
록펠러는 1911년까지 스탠다드 사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57세였던 1896년부터 중요한 일만 결정했을뿐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다. 이때부터 그가 치중한 일은 자선사업.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그의 재산을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기부’하기 시작했다.
자서전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기부 문화’를 중시하는 유태인의 종교관이 그대로 나타나는 대목이다. 자신이 소수인종으로 분류됐던 유태인인 만큼 록펠러는 흑인등 소수계와 종교단체 지원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1890년과 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에 6천만달러 이상 기부했고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등 셀수없을 정도의 사회복지 및 연구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기부한 금액만해도 모두 3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기 이전에 세계 석유업계는 7개의 주요 국제 석유회사들(International major oil company`들이 장악했다. 이들을 줄여서 메이저(major)라고 불렀고 7개 회사를 지칭해 `세븐 시스터스`라고도 얘기했다. 미국의 엑슨, 모빌, 걸프, 세브론, 텍사코등 5개사와 영국의 브리티시석유(BP)와 영국-네덜란드계열의 로열더치셀등 7개사였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석유의 생산 ·유통 ·정제 ·판매 등을 통합한 일관조업(一貫操業) 회사로서 세계 석유산업을 지배해 온 이들 7대 메이저는 1965년 하루 1,692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서방측 세계원유생산량의 68 %를 기록한 바 있으며, 한때 중동 석유생산의 99% 이상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은 물론 유럽의 메이저들도 모두 유태계 자본이라는 점. 로열더치셀은 유럽의 최대 갑부 유태인이었던 로스차일드가문의 소유이고 국영이었던 BP에도 실제 유태계 자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회사들이 앞으로도 합종연횡을 계속 하겠지만 결국 내용상으로 블랙 골드(Black Gold)라고 불리는 석유산업의 유태계 장악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실제 최근들어서도 기간산업중 기간산업인 에너지 산업에서의 유태계 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역설적인 예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회계부실 파동’으로 미국 경제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며 파산한 엔론의 경우도 흥망성쇠의 주역은 바로 유태인이었다.
회사를 대표한 최고 경영층인 케네스 레이 회장, 제프 스킬링 사장은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회사의 모든 자금을 줄을 통제하며 회사를 움직였던 CFO 앤드류 파스토우는 아주 독실한 유태인이었다.
엔론은 1990년대 초까지 평범한 천연개스 파이프라인 회사였지만 파스토우가 실리콘밸리의 첨단기술과 월스트리트의 금융기법을 회사 경영에 도입시키면서 규모가 급속히 커졌고 주가도 폭발적으로 올랐다. 파산 직전 엔론은 천연가스 전력 인터넷서비스는 물론 나무 펄프의 선물거래까지 하는 최첨단 에너지 중개 회사가 되어있었다.
파스토우가 개발한 각종 첨단 금융기법은 정부 당국의 규제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회계조작이 드러난 이후 증권당국이나 담당 회계사들은 “그동안 왜 눈을 감고 있었냐”는 지적에 “일부러 봐준 것이 아니라 몇발자국 앞서서 움직이는 파스토우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들을 따라갈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아무도 파스토우를 규제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제2의 록펠러가 아깝게 무너졌다는 동정론까지 나오기도 했다.
파스토우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유태인 이었다. 그가 다니는 휴스톤의 시나고그에서는 지금도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이다. 그가 5천만달러 이상을 챙겨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돌아 수사관이 그의 소재지를 파악했을 때 그는 시나고그에서 학생들에게 유대축일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부인과 함께 자선재단을 세워 휴스톤 지역의 시나고그와 어린이클럽 현대미술관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생활도 나름대로 검소했다. 그의 집은 휴스턴 근교에서 싯가 70만달러 수준이었다.
엔론의 내부 사정을 수사기관에 고발,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한 세론 왓킨스가 파스토우 집 근처에 1백만달러이상의 호화저택에서 살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출처=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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