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공은 접대를 매우 후히 하여줬으나 삼년 동안을 문밖에 나오지를 못하셨는데 선행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니 최공이 빈염 일체를 자기 부모와 똑같이 마련하여 주었다.
그때에 생원공께서는 이미 극노인이셨는데 선생께서 밤 사이 남몰래 등에 업고 재를 넘어 남으로 내려가 영천의 최사간 집을 찾아가셨다. 마침 그날 최공의 집에서는 잔치가 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었는데 선생은 곧바로 그 집의 사랑에 들러 잠깐 쉬고 계셨었다.
선생은 곧바로 그 집의 사랑에 들러 잠깐 쉬고 계셨었다.
최공은 이 사실을 알자 거짓 놀라고 노한 척하여 외치기를 (이것은 화를 싣고 와서 서로 함께 하자는 것이다)하고 몸소 치며 내쫓고 사랑채까지 불질러 버렸다. 선생은 쫓겨나와서 五리쯤 가자니 한 숲이 있기에 잠깐 쉬면서 생각하시기를 (최우는 나의 지심우인데 더구나 지금은 내가 궁해서 왔으니 필시 괄시는 않을터인데 아마 이번 일은 나를 위해서 하는 짓이리라)하고 거기에 머물러 밤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밤이 깊어지자 최공이 지팡이를 끌고 그 숲으로 와서 나직이 부르기를 (이우는 여기 있는가)하여 선생이 나서서 대답하니 최공은 얼싸안고 집으로 돌아가 낮에는 다락 위에서 거처하고 밤에는 규중(안채에 딸려 있는 도장방)에서 자게하였다. 신돈은 영천에 관문(공문서)을 발송하여 빨리 기포(정탐하여 체포함)하라 설쳤으나 고을에서는 정문을 올려 당초에 쫓아보낸 사연을 낱낱히 아뢰니 일은 무사해졌다. 최공은 새원공을 친부모처럼 봉양하니 생원공도 내 집처럼 마음놓고 지내실 수가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시니 최공은 염습과 빈장의 차비를 마련함에나 슬퍼함에 있어서 친부모와 다름없이 하였다. (별제 항의 기록에서 나왔다)
선생의 선세는 신라 내물왕 때에 내사령(휘는 자성)으로 칠원백(칠원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이 되어 대대로 그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신라가 멸망한 뒤에는 칠원만은 성을 굳게 닫고 절의를 지켜 항복치 않으니 여조가 크게 노하여 군병을 증원하여 환공하였으나 오랜 뒤에야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속(장계)들은 회안(지금의 광주 경안역)으로 옮겨 역리를 삼았다. 회안에서 복역함이 몇대나 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마다 어진 인재가 배출하였다.
그때에는 역리는 과거를 봐서 사적에 오를 수 없었으니 요로에 있던 여러 높은이들이 민망히 여겨 광주의 향리로 이속시켜 주었다. 향리는 의례히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기에 이를 계제로 하여 발신케 하려 함이었다. 그리하여 선생 이전에도 문중에 현달한 분들이 많았었고 고려 말기에는 선생의 五형제분이 모두 문과에 올랐으며 이조가 혁명할 무렵에는 이 판윤 양중(호는 석탄이니 둔촌의 사종질)이 숨어 지내면서 신복치 않아 크게 풍성을 일으키는 등 멀고 가까운 집안들이 크게 성하여 드디어 광주로 본을 하게 되었다.
「굴바위」
遁村뒤 일자산 西南쪽에 있는 굴로된 바위, 遁村 李集이 辛旽의 迫害를 避하여 이곳에 은거 했다함.
「遁窟(둔굴)」
遁村洞뒤에 있는 바위로 된 굴, 高麗末 李集이 이곳에 은거하여 號를 遁村이라 하였음으로 遁窟이라 함.
「遁村약물」
(冷井, 호추우물, 초천 찬우물, 둔촌약수) 遁村에 있는 약물, 물맛이 맵고 싸-함으로 호추우물, 또는 漢字名으로 초천(椒泉)이라 하며 찬우물(冷泉)이라 하는데 피부병, 위장병, 심장병 및 神經痛에 特效가 있다함.
「밖둔굴」
둔굴 바깥쪽에 있는 마을.
「삿갓바위」
굴바위 위에 있는 바위 그 모양이 삿갓과 같음..
「안둔굴」
둔굴 안쪽에 있는 마을.
「약수터」
호초우물 가에 있는 마을
출처 : 광주이씨대종회(http://www.gwanglee.or.kr)
'광주이씨(廣州李氏) > 광주이씨(廣州李氏)'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이씨 유래(1) - 시조 할아버지의 일화 (0) | 2017.12.01 |
---|---|
광주이씨 유래(3) - 청백리공(淸白吏公) (0) | 2017.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