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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廣州李氏)/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이씨 유래(2) - 둔촌 할아버지 일화

짐케리(이석일) 2017. 12. 1. 13:08


둔촌선생 영정

둔촌 유사(遺事)

선생의 휘는 집이요, 자는 호연인데 초휘는 원령이요, 자는 성로이며 호는 묵암자 또는 남천이라 부르셨다. 생원공의 제二자로 원의 태정 정묘 六월 二일에 나시어 벼슬은 봉순대부 판전교시사에 이르렀으며 명의 홍무 정묘년 六월 六일에 졸하셨는데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지 경연 춘추관사, 판의금부사, 세자 이사에 증직되셨다.
선생은 학문이 고명하시고 문장이 초매하셔 이름은 사림들 사이에 저명하였고 덕은 일세에 으뜸이어서 목은, 포은, 도은, 행촌, 야당, 척약재, 원재, 어촌등 제현들이 애경하고 추중치 않은 이 없었다.
천성이 개결하고 정직하셔 불의를 미워함이 지나치셨는데 홍무 무신년 가을에 역적 신돈의 문객중 선생과 동향인 채판서란 자가 있어 돈의 위세를 믿고 불의를 자행하기에 선생이 꾸짖어 물리치고 아울러 돈의 흉측한 실상을 나무랬더니 채가 돈에게 고자질하여 화가 곧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미복(미천한 사람이 입는옷)으로 어버이를 모시고 어린이를 이끌며 영남의 영천으로 도피하여 동년인 최원도에게 의탁하셨다.

최공은 접대를 매우 후히 하여줬으나 삼년 동안을 문밖에 나오지를 못하셨는데 선행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니 최공이 빈염 일체를 자기 부모와 똑같이 마련하여 주었다.


둔촌 선생 묘역

신해년 六월에야 서울(개성)의 현화리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도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야 서울에 들어와 보니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듯 하오. 몸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됐는데 이름만 옛 것이면 되겠오) 하시고 호연한 기운은 의가 모여야만 생긴다는 뜻을 취하셔 지금의 이름과 자로 고치셨다. 또 숨음으로써 난을 피할 수 있었기에 잊지 않기 위하여 둔자로 호를 하셨다.
(교리 필형의 기록에서 나오다)
세상에서 전해오기는 둔촌 선생께서는 일찌기 송경의 용수산 아래에 사셨는데 신돈의 문객인 채판서란 자와 한 마을이었다. 선생께서 신돈의 하는 짓을 분히 여겨 대중 앞에서 그 죄상을 크게 꾸짖었더니, 채가가 암암리에 사람을 사주하여 해를 가하려 하였다.

그때에 생원공께서는 이미 극노인이셨는데 선생께서 밤 사이 남몰래 등에 업고 재를 넘어 남으로 내려가 영천의 최사간 집을 찾아가셨다. 마침 그날 최공의 집에서는 잔치가 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었는데 선생은 곧바로 그 집의 사랑에 들러 잠깐 쉬고 계셨었다.

선생은 곧바로 그 집의 사랑에 들러 잠깐 쉬고 계셨었다. 
최공은 이 사실을 알자 거짓 놀라고 노한 척하여 외치기를 (이것은 화를 싣고 와서 서로 함께 하자는 것이다)하고 몸소 치며 내쫓고 사랑채까지 불질러 버렸다. 선생은 쫓겨나와서 五리쯤 가자니 한 숲이 있기에 잠깐 쉬면서 생각하시기를 (최우는 나의 지심우인데 더구나 지금은 내가 궁해서 왔으니 필시 괄시는 않을터인데 아마 이번 일은 나를 위해서 하는 짓이리라)하고 거기에 머물러 밤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밤이 깊어지자 최공이 지팡이를 끌고 그 숲으로 와서 나직이 부르기를 (이우는 여기 있는가)하여 선생이 나서서 대답하니 최공은 얼싸안고 집으로 돌아가 낮에는 다락 위에서 거처하고 밤에는 규중(안채에 딸려 있는 도장방)에서 자게하였다. 신돈은 영천에 관문(공문서)을 발송하여 빨리 기포(정탐하여 체포함)하라 설쳤으나 고을에서는 정문을 올려 당초에 쫓아보낸 사연을 낱낱히 아뢰니 일은 무사해졌다. 최공은 새원공을 친부모처럼 봉양하니 생원공도 내 집처럼 마음놓고 지내실 수가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시니 최공은 염습과 빈장의 차비를 마련함에나 슬퍼함에 있어서 친부모와 다름없이 하였다. (별제 항의 기록에서 나왔다)


이포의 봉서정

선생께서는 영남에서 돌아오신 뒤에 천녕강사에 우거하셨는데 침류정(목은의 장자명), 육우당(척약재의 정자명) 척약재와는 서로 가까워 조석으로 만나 애기 나누면서 만년을 보내셨다. 임종에 목은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환갑이 된 연래에는 백병이 침노하니, 삼복과 가을철을 누워서 보냈노라. 향산거사는 필시 아무 탈 없겠지, 나는 먼저 도솔궁으로 가려네.)

(필형의 기록에서 나오다)

당세의 유학의 학자로는 삼은(목은, 포은, 도은) 오촌(둔촌, 향촌, 어촌, 상촌, 양촌) 팔정(둔촌, 척약재, 원재, 야당, 석탄, 롱암, 정재, 덕곡) 구일(둔촌이집, 이석탄양중, 서금천견, 길야은재, 원운곡 천석, 최만육양, 이대은유, 민반암유, 이처사온)등의 훌륭한 분들이 있어 도의로 온 나라의 경중한 바가 되었었다.

선생의 선세는 신라 내물왕 때에 내사령(휘는 자성)으로 칠원백(칠원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이 되어 대대로 그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신라가 멸망한 뒤에는 칠원만은 성을 굳게 닫고 절의를 지켜 항복치 않으니 여조가 크게 노하여 군병을 증원하여 환공하였으나 오랜 뒤에야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속(장계)들은 회안(지금의 광주 경안역)으로 옮겨 역리를 삼았다. 회안에서 복역함이 몇대나 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마다 어진 인재가 배출하였다.

그때에는 역리는 과거를 봐서 사적에 오를 수 없었으니 요로에 있던 여러 높은이들이 민망히 여겨 광주의 향리로 이속시켜 주었다. 향리는 의례히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기에 이를 계제로 하여 발신케 하려 함이었다. 그리하여 선생 이전에도 문중에 현달한 분들이 많았었고 고려 말기에는 선생의 五형제분이 모두 문과에 올랐으며 이조가 혁명할 무렵에는 이 판윤 양중(호는 석탄이니 둔촌의 사종질)이 숨어 지내면서 신복치 않아 크게 풍성을 일으키는 등 멀고 가까운 집안들이 크게 성하여 드디어 광주로 본을 하게 되었다.


둔촌선생잡영

박 판서 계현(호 관원)의 시에 이르기를 (울창한 회안의 이문에는, 대대로 어진 인재 있었도다)하였고 오 이상 윤겸(호는 추탄)의 시에는, (빛나는 손지들 회안의 이씨로다)하였으며, 정 판서 사룡(호는 호음)의 시에도 (회안의 서업은 우리 동방에 떨쳤도다)하였는데 칠원에서 회안으로 이속되고 회안에서 광주로 옮겼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들을 증빙할 만한 형적이 되며 또한 그 사실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지제교 휴징의 기록에서 나오다)

洞名 由來

遁村洞(둔촌동)

元來 京畿道廣州郡九川面의 一部로서 高麗末의 節臣이요 文章道學이 높은 遁村公(集)이 살았기 때문에 그분의 號인 遁村을 따서 遁村이라 했는데 一九一四年 三月一日 京畿道 區域 劃定에 따라「약수터」「굴바위」 「안둔굴」「밖둔굴」을 倂合하여 遁村이라 하다가 一九六三年 一月一日 서울特別市에 編入되어 遁村洞이 됨.

「굴바위」

遁村뒤 일자산 西南쪽에 있는 굴로된 바위, 遁村 李集이 辛旽의 迫害를 避하여 이곳에 은거 했다함.

「遁窟(둔굴)」

遁村洞뒤에 있는 바위로 된 굴, 高麗末 李集이 이곳에 은거하여 號를 遁村이라 하였음으로 遁窟이라 함.

「遁村약물」

(冷井, 호추우물, 초천 찬우물, 둔촌약수) 遁村에 있는 약물, 물맛이 맵고 싸-함으로 호추우물, 또는 漢字名으로 초천(椒泉)이라 하며 찬우물(冷泉)이라 하는데 피부병, 위장병, 심장병 및 神經痛에 特效가 있다함.

「밖둔굴」

둔굴 바깥쪽에 있는 마을.

「삿갓바위」

굴바위 위에 있는 바위 그 모양이 삿갓과 같음..

「안둔굴」

둔굴 안쪽에 있는 마을.

「약수터」

호초우물 가에 있는 마을


출처 : 광주이씨대종회(http://www.gwangle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