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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廣州李氏)/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이씨 유래(3) - 청백리공(淸白吏公)

짐케리(이석일) 2017. 12. 1. 13:03


청백리공 묘비

청백리공 묘갈명 (淸白吏公 墓碣銘)

공의 성이 이요, 휘는 지직이요, 자는 백평이며 광주인이니 둔촌 선생 휘 집의 장자이시다. 포은 정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마음가짐은 정대하고 학식은 고명하였다. 홍무경신(1380) 전계서승으로 대소과에 다 아원으로 급제하여 한림교리를 역임하고 경승부소윤을 거쳐 삼전대목(세번이나 큰 지방의 고을을 다스렸다는 말로 세 곳은 평창, 충주, 청주임)을 지내시고 관동 호서 두 곳 관찰사를 지내시고 내직으로 들어와서 형조우참의와 보문각직제학이 되었으며 뒤에 대광호부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로 추증되었다.

공께서는 소도지변을 당하여 몸을 던져 상험한 칼날 앞에서 말 고삐를 잡고 간해 가로되

(백일 중천(하늘의 해가 밝아)에 부왕 앞에서 아우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하며 말리니 좌우에서 찌르고자 하거늘 태종이 급히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고부인데 어찌 누구의 부탁을 받고 그랬는가) 하고 야외로 축출하고 자손들이 출입도 금하였다.

그 때에 오직 변춘정 계량이 말하되, 이모는 청간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그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백의 숙제와 견주어 다를 바 없다 하였으니 이는 일대의 공론이 아니겠는가. 공이 이미 태종의 뜻에 거슬림을 받아 태종의 세를 마치도록 광주 탄천과에 물러나 단표누황에서 담담한 생활로 누됨이 없이 지내셨으니 이는 정공지하의 시를 보면 가히 상상할 수 있다. 태종이 말년에 이르러 동궁에게 공을 버리지 말라고 명하였던바 세종이 즉위 하자마자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어찌 불행하다 아니하려. 유사에 이른바 밝고 밝은 절개와 늠름한 충성은 위로 일월과 그 빛을 다툰다 라고 한 것은 지나친 칭찬이 아니리라. 공의 맑은 절개는 한 세상에 표준이 되었으므로 조정에서 청백리로 녹선하는 데 공으로 수위를 삼았으며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이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른 자가 많이 있다. 부인은 경주이씨의 인주부사 원보의 따님이시고 참판인 승손의 고모가 되신다.
성품이 단정하고 엄하시어 가정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니 아들 충희공이 숭반에 올랐는지라 광주 아전이 와서 뵈올 때 뜰 아래에 앉게 하였더니 부인이 주렴 사이로 보시고 공을 불러 꾸짖어 가로되 이 아전이 비록 천하나 너의 조부와 동료라 너는 그 근본을 생각지 못하느냐 하시메 충희공이 엎드려 사과하고 그 후로는 광주 아전이 내알하면 반드시 맞아 동좌하였다고 한다. 부인은 현덕의 배필로 가훈을 잘 밝혔으므로 3자가 다 등과하니 장손은 의정부 사인이요, 인손은 우의정을 시호가 충희요 예손은 관찰사이다.
아, 본원을 좇아 대로 이어 빛나니 학향과 절의에 있어서도 둔촌 선생께서 우뚝하게 세웠음에 공이 능히 계승하고 청렴결백함에 있어서는 공이 이미 몸소 실천하였으며 6대손 충정공 준경이 이어서 청백리로 뽑히고 겸하여 시관 택민 위업을 이룩하였으며 문학의 박아함에 있어서는 문경공 극감이요, 기우와 덕량에 있어서는 정원공 윤경이며, 훈업과 사공에 있어서 충희공 5자와 이어서 문익공 덕형, 문희공 적립이 있고, 성리학에 있어서는 극기, 연경, 약빙, 유경이 있으며 청담용태에 있어서는 판관수완이요 망신숭국에 있어서는 충민공 상안이 있어 능히 세서를 이어 빛나게 하였고 이밖에 영현 중열, 덕열 윤우 필영이 다 효우와 청백함에 돈독하여 선대의 덕업을 이어 닦았으니 이것이 둔촌선생과 공이 가르침을 내려 후손에 일깨운 보람이라 할 것이며 또한 공에게도 광영이 있는 일이 아니되겠는가. 이밖에 여라 지파의 숭작직은 대충 둔촌선생 묘갈에 실려있다.

명하여 가로되, 공의 묘는 실한 곳에 있나니, 오른쪽 양강에 있다.
의관들 공경하나니, 어찌 무궁치 않을손가. 
인의 만을 천모하였으며, 헌장을 잘도 지켰도다.
천세만세 후까지, 산은 높고 물은 길이 흐르리라.

출처 : 광주이씨대종회(http://www.gwanglee.or.kr)